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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칼럼] 성숙한 창조론의 기준 2

창조 이론 중에는 성숙한 우주와 지구를 순간적으로 창조하였다고 보는 ‘성숙한 창조론’, ‘문자적 창조론’과 오랜 기간이 걸렸다고 보는 ‘오랜 창조론’(간격이론, 날 시대이론,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론)으로 대별된다. 오늘은 성경 구절에서 인간의 창조 구절을 찿아 성숙한 창조론, 문자적 창조론의 성경적 근거를 살펴본다. 창조의 기준이 되는 인간에 관한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 1:26절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다른 구절도 있다. “이것은 아담의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1~2). 이들 구절에서 창조주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 것임을 계획하셨고, 진화론적 근거가 되는 남자와 여자 이전의 인류 생명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진화와 인간 창조와는 아무런 성경적 연관이 없다. 성숙한 창조에 대한 근거는 구약의 짝인 신약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마가 10: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마태 19:4),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고전11:8),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2). 인간 창조, 특히 첫 사람(성이 남성) 아담과 두 번째 사람 이브(성이 여성)의 창조 구절은 창세기 2:7절, 창2:21절에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2). 창조의 기준으로 볼 수 있는 인간 창조에서 사람은 순간적으로 애기를 생산할 수 있는 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고 그 어떤 진화론적 이론도(특히 오랜 시간)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물질이 처음부터 제2원소가 포함된 상태로 지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근거 또한 다른 성경에서도 찿아볼 수 있는데, 우주와 지구의 모든 물질들(우라늄, 납, 빛, 별들, 보석)과 환경은 인간을 위해 지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지구를 말한다.)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인간이 순간적인 창조의 결과라면 당연히 그 환경되는 우주와 지구 또한 순간적인 창조의 결과로 믿을 수 있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11-16

[창조과학칼럼] 에덴 동산의 광부와 광물 2

지난 칼럼에 이어 에덴 동산에 있었던 광물에 대해 살펴보자.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 가운데 창세기가 실존했다면 광물이 있었던 장소도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후에 일어난 노아의 대홍수로 인해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광물이 있었던 강과 광물에 대해 알아본다. 에덴 동산을 흘렀던 네강 가운데 광물에 관해 언급한 강이 비손 강이다. 광물과 향료의 산지인 하윌라를 돌아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 2:11). 비손(pishon)이란 강 이름의 뜻은 ‘값없이 흐른다(사 55:1, 계 22:17)’는 뜻으로 생명의 모든 것을 자라게 하기 위해 값없이 흐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겔 47:9, 12) 하윌라의 모든 땅을 덮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윌라(Havilah)는 ‘자라게 한다’는 뜻으로 성경 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비손 강이 흐르는 곳과 맞닿은 곳의 장소며 그 곳에서 금과 진주(또는 값진 향료로 해석), 호마노가 산출되었다. 그리고 구스의 아들이며 함의 손자(창10:7, 대상 1:9)로, 욕단의 아들이며 셈의 자손(창10:29, 대상 1:23)으로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사울이 아말렉을 추격한 곳(삼상 15:7)의 장소 로도 사용되었다. 금(gold)은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광물이다. 아마도 이것은 금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여러 광물을 창조하셨지만 변하지도, 다른 광물로 바뀌지도 않는 창조된 그대로의 원료를 가진 광물이기 때문이다. 금은 화학원소이지 화합물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를 정금으로 비유하여 창조주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게 해준다. 베델리엄(bdellium)은 공동번역에서 ‘브돌라’라는 향료로 번역되고 있고, 시리아역(베룰레; berulech)에는 '진주'로 해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지(樹脂)로 된 값비싼 향료의 일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호마노(onyx stone)는 보석 ‘마노’의 일종으로 석영에 옥수 등이 혼합된 혼합 광물로 주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고대로부터 귀하게 여겨져 보석 세공의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던 보석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었다.(출25:7; 35:9) 에덴 동산에 존재했다는 광물에 관한 기록에 의해 현재의 광물과 원소는 창조 때 완성된 것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성숙된 상태로 창조된 것을 부인하는 이론이 많으나 성경에는 성숙한 상태로 창조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11-02

[창조과학칼럼] 에덴 동산의 광부와 광물 1

칠레의 광부 생환 소식으로 광부라는 단어가 전과는 달리 극적이며 인간 승리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에덴 동산에서의 광부와 광물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는 무궁무지한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것은 부의 사회적 분배에 관심 있는 분이나, 오랜 지구 연대에서 탈출하지 못한 과학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에덴 동산에 관한 내용은 성경책(66권)의 첫 책인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에 존재했던 광물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 2장과 에스겔 28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그 땅의 금(gold)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bdellium)과 호마노(onyx stone)도 있으며, 둘째강의 이름은…”(창2:11).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ruby)과 황보석(topaz)과 금강석(diamond)과 황옥(beryl)과 홍마노(onyx)와 창옥(jasper)과 청보석(lapis lazuli)과 남보석(turquoise)과 홍옥(emerald)과 황금(gold)으로 단장하였음이여”(겔 28:13). 그 외의 책에서 에덴동산에 있었던 똑같은 광물과 보석들을 들어 열거하고 있다. (성경 속의 광물 및 보석은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창세기에 광부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 광부가 있었을까? 에덴 동산에 거주한 사람은 아담과 그의 부인 이브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으니, 광부가 있었다면 아담과 이브였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광부란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죄 짓기 전의 인류 첫 부부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었던 복을 고려한다면 광물을 갖기 위해 일했던 그들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목숨 걸고 수백미터 땅을 파들어 가는 노동자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첫 자연은 현재의 자연환경과는 아주 달랐다. 창조 첫 시기의 자연에는 풍부한 광물과 먹거리(식물)들이 예비되어 있었다. 원역사를 다룬 창세기의 구절이 이를 잘 증거한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8, 19). 칠레 광부가 700미터 땅 밑까지 파내려가 광물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은 에덴 동산의 상황이 아니다. 인류의 죄가 없던 시절과 죄가 있는 시절과의 차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을 근원으로 하는 강가에서 또 근처의 산과 들에서 각종 광물과 보석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복 받은 광부였다. 칠레 광부 33인은 그들의 첫 조상 역시 광부였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10-26

[창조과학칼럼] 지질학과 천문학의 차이

지난 칼럼에 우주 생성을 다룬 호킹 박사의 저서에 대해 언급했다.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진화론적 천문학 분야의 사람과 글을 만나게 되면 가슴 속이 답답해져 옴을 느낀다. 이 분들이 지질학과 천문학의 차이점을 연구해 보고 이해한다면 성경의 창세기가 실역사라는 것과 창세기의 기록이 신화나 전설이 아님을 좀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창조를 이해하기 위해 지질학이 천문학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지질학과 천문학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평범한 범인들은 지질학과 천문학 중에, 어디에 기초를 두고 공부하는 것이 우선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창조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우선 순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적 방법의 차이= 과학은 연역과 귀납의 논리학을 기초로, 관찰하고, 이것을 이론화 시키고, 실험하고, 재실험 할 수 있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같은 방법으로 자연속의 법칙이 밝혀진다. 지질학과 천문학에서 관찰하고 실험해 볼 수 있는 분야는 단연 지질학이다. 땅은 관찰하고 직접 실험해 볼 수 있는 분야다. 가상이나 가정하는 것이 천문학보다 훨씬 적다. 천문학은 너무 광대하며 장비와 실험기기 또한 한계가 있다. 결정적으로 과학적 방법이 넘지 못할 시간적 한계가 가로막고 있으며 실험과 재실험 해 볼 수 없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반면에 지질학은 수로 실험(2002년 Guy Berthault의 혼탁류 흐름 수조 실험) 등을 통해 퇴적 메커니즘을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 실험과 재실험할 수 있는 과학 분야다. ▷창조주의 메시지= 성경에서 창세기의 특징을 언급한다면 지질학(창 6, 7, 8장)과 천문학(창1: 14-18) 분야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분야 중에, 어느 것이 더 자세히 언급되었으며, 더 중요성을 두고 있는지를 언급하라면 필자는 지질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인 당신이 창조주라고 가정하고, 인류에게 창세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메세지를 남겨 놓으려 한다면 인류가 사는 땅과 하늘의 별 중에서 어느 곳을 택하겠는가? 당연히 땅이어야만 한다. 인류가 사는 땅이라야만 인류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러면 땅(지질학)과 우주(별, 공간 포함)에서 창세기의 기록대로 되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면 된다. 이것을 평범한 범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천문학을 다루는 학자들도 신경쓰야할 부분이다. 즉 자신의 과학 분야를 우선하기 이전에 진실을 알 수 있기 위해 지질학(즉 성경 기록)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질학의 유익= 지질학이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지층의 형성 과정과 화석을 통해 진화론의 허구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지질학은 생물학과 화석학과 연관되어 있어 지구에 있는 생물의 처음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반면, 천문학은 이러한 유익을 줄 수 없다. 하늘엔 지층과 화석이 없다. ▷노아의 대홍수= 이 땅에는 그랜드케년이 있으며 모습을 드러낸 여러 지층이 있다. 이들 장소는 단순한 지질학 학문과 관광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성경 속 대홍수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해 창조주가 남긴 흔적이며 인류가 겪었던 뼈아픈 기록이며 현장이다. 성경 속에서 창세기의 대홍수 사건만이 유일하게 3장을 할애하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371일 간) 아주 자세히 시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질학과 천문학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호킹박사의 책 한권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늘을 먼저 쳐다볼까 염려해서다. 인류는 내가 태어났고 앞으로 묻힐 땅의 사실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고, 이 땅에 바로 그 창조주가 나와 독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찿아온 특별한 곳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피값으로 당신의 구원을 주신 땅이기에 더욱 그렇다.

2010-10-12

[창조과학칼럼] 호킹 박사의 좋은 선배

세상에는 의견을 제시해 세계관의 방향을 가르키는 철학자, 정치가, 법률가, 과학자, 예술가 등의 소수 그룹이 있고 그 방향을 인정하고 따르기로 결정하는 다수 그룹인 세계시민이 있다. 세계관이란 이들 소수 그룹이 제시한 의견을 다수 그룹이 수렴 할 때,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적(마치 상식적인) 관점이 된다. 이 세계관은 진리와 비진리를 따지지 않고 수용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형성된다. 대표적인 예가 진화론이다. 19세기 찰스 다윈이 제시한 진화론을 세상이 받아들였고, 현재 그 이론은 굴드와 도킨스 등의 소수 사람에 의해 세계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몇달 전, 영향력있는 이론물리학자인 호킹박사가 자신의 최신 저서(위대한 설계 Grand Design. 레오나르드 므로디노우와 공저. 2010 벤탐 출판사)를 통해 창조를 기초한 유신론을 파괴하며, 잘못된 진화론적 세계관 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무신론과 이신론의 혼합된 믿음을 바탕으로 세상은 신이 창조하지 않았으며(중력이라는 물리법칙의 결과로 본다), 인간을 다중우주 속의 존재자로 만들어 진화론적 개념의 근거인 오랜 시간과 우연의 결과에 동조하고 있다. 또한 그런 광대한 공간 속에서 미약하고 미숙한 존재로 출발한 인간이 이룬 현재의 상태를, 신의 경지로 높여,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호킹 박사와 같이 유한한 지식으로 우주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양 여기는 전문 지식인을 위해 좋은 선배 한 분을 소개한다. 성경 속의 욥이라는 사람이다. 욥을 소개하는 것은 저자의 이번 책에서 기독교의 인식틀을 형성하고 있는 창조주를 깨기 위해 비유한, 이탈리아 마을의 어항 속의 금붕어 비유는 성경 속의 욥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고민했던 주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욥기는 죄를 짓지 않은 의인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께 질문하며 항의하는 내용이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38장에 나타나셔서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찌니라”라고 하시며 41절까지 욥에게 질문을 퍼부어신다. 질문들은 기상학, 지질학, 지구과학, 생물학, 물리학, 천체학, 수리학, 전기학 등 셀 수 없이 많은 자연과학에 관한 것들이다. 해답을 주시는 대신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것이다. 욥은 지식·지혜·능력에 관한 한, 한계가 있는 일개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피조된 인간으로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재 가운데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실로 호킹 박사가 우선적으로 연구하고 질문해야 할 분야는 하늘이 아니라 자신과 죄에 관한 것이다. 인류는 그의 책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학으로 우주의 기원과 신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으나 근원적인 것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 욥기를 주신 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피조물임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오늘날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호킹이라는 지식인을 통해 보게 된다.

2010-10-05

[창조과학칼럼] 성경속 숫자의 의미

성경에 기록된 숫자에 관한 칼럼을 쓰려고 준비하는 과정 중에 한 가지 부담이 생겼다. 비성경적이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오해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전편에 밝혔듯이 성경에 적힌 숫자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런데, 몇 가지 사례를 꼭집어 반대 의견을 밝히려는 분들을 위해 숫자의 또 다른 기능이 있음을 첨가하기로 한다. 성경 속 숫자는 연대(시간, 날짜), 수치, 수량 등의 산술적 내용을 뜻하기도 하지만 기독교 만의 상징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능도 있다. 또 구약 성경에서는 숫자를 숫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 백성들과 교감할 수 있는 수비학적인 형용사적 표현도 있을 수 있음을 먼저 알아두시기 바란다. (예로 필자가 어렸을 당시 아주 많다는 것을 ‘억’이라고 표현했다. 이 때의 ‘억’은 숫자로 꼭 100,000,000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번 칼럼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에 관해서 전체적으로 알아 보고, 각각의 숫자가 성경 속에서 나타내는 의미와 구절의 구체적인 예는, 후에 또 다른 칼럼을 통해 살펴본다. 성경 속의 숫자는 대략 아래에 적인 1부터 666까지 정도이다. 앞의 숫자는 성경에 기록된 숫자이며 괄호 안은 그 숫자가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성있게 나타내는 의미를 뜻한다. 1(일치), 2(나눔, 분리), 3(부활), 4(첫번째 창조), 5(은혜), 6(사탄), 7(완전, 온전, 끝 맺음), 8(새로운 탄생), 9(성령의 열매), 10(율법), 11(심판), 12(신의 능력, 다스림, 권위), 13(죄, 반역, 타락), 14(구원, 해방), 15(안식), 16(사랑), 17(승리), 18(구속, 얽매임), 19(믿음), 20(구속, 값을 치루다), 21(죄가 관영함), 22(빛, 나타냄), 23(죽음, 사망), 24(제사장직), 25(죄 용서), 26(복음), 27(복음 전파와 예언), 28(영생), 29(출발), 30(피), 31(후손, 씨), 32(언약), 33(약속), 34(인내), 35(소망), 36(적), 37(높임), 38(의), 39(진리), 40(환란, 시험), 41(속임), 42(예수님의 재림), 44(멸망), 45(상속, 기업), 46(둘째 사망), 48(성막, 거처), 49(하나님의 진노), 50(영, 성령, 이스라엘의 희년), 54(신자의 영생보장), 61(교만), 66(상, 우상숭배), 70(이스라엘의 포로와 석방, 해방), 77(복수), 91(내어 쫒음), 99(인), 100(선택), 600(전쟁), 666(짐승의 숫자). 독자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숫자는 1, 3, 6, 7, 12, 40, 666 정도일 것이다. 그 중에서 7, 12, 40의 예를 우선 들어보자. 7은 그 의미가 ‘완전, 온전, 끝맺음’이라고 했다. 창세기 2:1,2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는 구절로 주 7일의 완전함이 기록되어 있다. 12는 ‘신의 능력, 다스림, 권위’다. 12지파, 12제자, 12 궁성,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12광주리가 남았었다. 40은 ‘환란, 시험’의 의미다. 신약의 예수님 40일 광야 시험이 있고, 구약의 대홍수 때도 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도 40년간 이다. 성경 속의 숫자는 신화가 아니다. 오랜 성경 기록 기간을 주관하셨던 창조주의 흔적이다.

2010-09-14

[창조과학칼럼] 자동차 뒷면은 전쟁중

운전 도중에 자동차 뒷 면을 살펴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기발한 방법들을 동원해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리는 곳이다. 국기로 알리는 애국심,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자랑하고픈 부모, 애관견 스티커로 나타내는 동물 사랑, 인생관, 취미, 유머……. 가히 살아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표현된 대부분이 약자, 글자, 그림이며, 가끔은 인형이나 실물 모형이 등장 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총과 칼, 대포 소리만 없을 뿐이지 종교적 전쟁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물고기 문양이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물고기 문양은 기독교인을 뜻한다. BC 64년부터 250년간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그림이 사용되었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반을 그려 넣음으로서 서로가 기독교인임을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모형, 조각품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독자들께서는 이 물고기 문양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의 창조를 믿는다는 뜻인 ‘헤엄치는 물고기’ 즉 ‘다리가 없는 물고기’ 문양이 있는가 하면, 진화론을 믿는다는 의미로 물고기에 다리를 붙인 ‘걷는 물고기’ 문양이 있다. 이것들은 같은 물고기 문양이지만 전하는 뜻은 180도 다르다. 진화론자들은 육상 생물은 해양 생물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진화론 또한 실험과학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다윈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걷기 시작한 물고기’의 흔적인 화석을 찿으려고 노력해 왔으나 발견된 적이 없다. 진화론에서는 약 3억5000만년 전에 해양과 육지 생물의 중간 단계로 살았다고 믿는 ‘실라컨스(duddjfh wjrdjdi ehla)’를 예로 든다. 실라컨스는 앞 지느러미가 약간 휘어져 다리처럼 발달되어 있고, 아가미 호흡과 허파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어, 물고기가 양서류로 진화한 증거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1938년 전설로 알려졌던 이 물고기가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더우기 전혀 진화한 흔적이 없는 채로 발견되어 진화론 학계에 충격을 더해주었다. 이후 200마리나 더 잡혔지만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아 중간 단계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창세기의 선언대로 현재 생물의 종은 불변이다. 이것은 실험 과학의 결과로서 창세기를 증거한다. 창조론, 진화론 모두의 물고기 몸통에 글씨가 적혀 있다. 창조론 물고기에는 ‘ΙΧΘΥΣ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시다)’라는 헬라어 문장의 첫 머리 글자의 합성어가 적혀있고 ‘물고기’를 뜻한다. 다리가 달린 진화론 물고기의 몸통에 있는 글자는 ‘DARWIN(다윈)’이다. 우리 모두는 자동차로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다리가 달리 문양의 물고기로 진화론자임을 나타내는 운전자를 위해, 성경은 미리 알려주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8-31

[창조과학칼럼] 성경 속의 숫자

필자가 창조를 전하는데 은사를 받고나서 창조과학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필자를 소름 돋게한 자료가 있다. 성경 속의 숫자에 관한 자료다. 숫자의 의미를 깨우치고 난 후에, 너무나 놀라 온 몸에 소름이 돋은 적이 있다. 성경 책에 나와 있는 숫자는 아무렇게나 등장된 숫자가 아님을 이 칼럼을 통해 여러 독자들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와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능력을 성경 속의 숫자로도 나타내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란다. (물론 모든 숫자를 상징이나 표상적인 면만으로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숫자에는 변하지 않는 특이성이 있다. 세상에는 환경, 문화, 언어나 단어 등의 변하는 것과 하늘의 별자리, 시간, 계절 등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숫자는 국가나 인종, 세대를 초월해 변하지 않으며 동일하게 인류가 사용·공유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성경과 숫자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자세한 예들은 다음 칼럼에서 살펴본다. 첫째, 숫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디모데후서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 기록된 숫자 또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사람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숫자를 대수롭게 볼 일이 아님을 다음 칼럼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숫자의 개념으로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였다. 에베소서 4:4-6절 “몸이 하나요(one)요 성령도 한(one) 분이시니”, “주도 한(one)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one)요 세례도 하나(one)요”, “하나님도 한(one) 분이시니” 인간의 부족한 개념 이해를 위해 숫자를 사용하여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였다. 셋째, 신구약이 한 짝임을 숫자도 증거한다. 성경 66권 속에 기록된 숫자는 어느 성경책에서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어 구약과 신약이 한 짝임과 동일한 초월자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입증한다. 대표적인 숫자가 환란과 시험을 뜻하는 40이다. (노아의 홍수와 예수님의 광야시험)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임을 숫자도 증거한다. 넷째,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숫자가 입증한다. 로마서 1: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는 말씀은 세상 만물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능력이 있다고 기록한다. 성경의 기록대로, 보이는 세상은 숫자의 세계이다. 만물은 셀 수 있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학적 계산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이룬 과학은 숫자 위에 서있다. 만물을 숫자로 설계하신 분, 이 숫자를 주신 분 그리고 숫자를 사용할 능력을 주신 분이 우리 죄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예수님이심을 성경이 알려주는 핵심이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8-24

[창조과학칼럼] 중세 과학자들의 고백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로버트 보일, 뉴턴, 멘델, 파스퇴르, 맥스웰, 조지 워싱턴 카버…. 이들은 일반인이 보통 기억할 수 있는 중세 및 근대 과학자 이름들이다. 우리는 이들 과학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의 학교에서 조차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들의 믿음 생활이다. 여기 그들이 남긴 글과 스스로 쓴 비문을 소개한다. 이것으로 그들이 과학자이면서도 자연을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신,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얼마나 경외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평생 감사하며 지냈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 바울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베드로에게 베풀었던 은총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의 도둑에게 보여주고 베풀어 주셨던 그 은혜만이라도 주옵소서.”(코페르니쿠스-지동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는데, 한 권은 자연이라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성경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에서 배운다.”(갈릴리오 갈릴레이). “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사랑합니다.”(케플러) “나는 천체를 측량하곤 하였네, 이제 나는 땅의 그림자들을 측량하려 하네, 내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지만, 내 육신의 그림자는 여기 누워 있네.”(케플러가 스스로 쓴 비문).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혜성들의 아름다운 체계는 이지적이고 능력있는 분의 계획과 주관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이분은 세계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 분은 주 하나님으로 불린다.”(뉴턴-만류 인력을 설명한 ‘원리’의 마지막 부분). “그는 모든 생애에 있어 겸손하고 조용하며 점잖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단 목표를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겸혀히 믿어 온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결과였다.”(조셉 리스터-외과 수술의 선구자. 대영백과사전에 그를 표현한 내용).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작품이다. 오직 그 분만이 나의 이 모든 시도를 통하여 지금의 나를 이 위치에 이르게 하셨을 뿐이다. 영광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님뿐이다.”(모르스-전신기 발명). “하나님은 나에게 십계명과 더불어 또 한 가지 계명을 내려주셨다. 그 열한 번째 계명은 이것이다. ‘과학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올라가라. 거기서 지구의 무게를 달고, 공기의 무게도 달며, 조수에 대하여 알아보아라. 행성들에게 운행의 길을 알려주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태양의 여러 현상을 조절하라.’” (캘빈-절대 온도 발견. 16살 때의 일기장 기록 내용). 보이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현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보이지 않는 창조주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드리길 바란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8-17

[창조과학칼럼] 할리우드 성경

세상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이외에, 또 다른 성경이 하나 더있다. ‘헐리우드 성경(Hollywood Bible)’이다. 성경의 내용을 상업적 목적을 위해 각색한 것으로, 사람의 호기심을 위해 세계의 영화 본고장인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를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만든 성경 영화의 내용이 곧 성경적 내용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를 살펴보면 첫째, 교인이나 독자들이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영화가 주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특히 영상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뇌리에 쉽게 남게 되고, 그 결과로 성경적 내용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 작은 칼럼으로 실제 일어났던 창세기의 내용이 사실대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첫째, 홍해의 갈림. 출애굽기에는 바다가 갈라지는 내용이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기 위해 모세의 극적인 액션 장면이 필요 하겠지만, 성경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14:21). 성경에는 모세가 바다 위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고만 기록한다. 지팡이로 바다를 치거나, 높은 곳에서 큰 액션을 취한 내용이 없다. 모세의 이러한 단순한 행동 만을 허락한 것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다. 둘째, 노아의 홍수. 죄악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내용이 창세기 6~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전세계적인 홍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헐리우드 성경에는 지엽적인 홍수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동물을 싣는 데 있어서, 공룡을 싣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7:4),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창7:19),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창7:16). 성경 기록에는 모든 지면이 물에 잠겼고, 심판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방주에 들어간 짐승은 후에 방주에 내려 인간과 함께 지낸적이 있는 모든 짐승들의 암수라고 기록한다. 여기에는 사람과 함께 산 적이 있는 공룡도 포함된다. 세째, 바벨탑 사건. 인류의 현재 여러 언어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 되었던 바벨탑이 신의 저주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창11:8, 9). 영화 상으로는 바벨탑이 신의 저주에 의해 무너지고, 파괴되는 장면이 연출되어야 상업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기록에는 성 쌓기를 그쳤다고 되어 있다. 인간이 즐거워하고 주목하고 있는 곳을 사단이 그냥 놔 둘리 없다. 문화 중에서 눈과 귀와 몸의 느낌이 살아나는 곳이라 생각되면 성경적으로 점검해 봐야 한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8-10

[창조과학칼럼] 다윈의 7가지 공헌 (1)

이 글은 Don Batten 박사의 ‘다윈의 공헌’이란 글을 두 편의 칼럼으로 재구성했다. 내용은 미국 회의론자협회(American Skeptics Society)에서 셔머(Michael Shermer) 박사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세계에 7가지의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한 내용을 진리인 성경과 과학적 결과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한 것이다. 독자는 현재 세상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진화론의 허구와 여러 세대에도 불변으로 전하고 있으며 과학과도 일치하고 있는 성경 기록과의 차이를 알 수 있다. 1. 다윈은 종의 불변 세계를 변화하는 진화의 세계로 바꾸었다. 세포 하나가(?) 나무로, 동물로,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생물체는 고유의 종이 있으며, 그 종류(KIND)대로 번식한다고 알려주고 있다. 현대 과학은 성경기록 대로 종의 불변을 지지한다. 2. 다윈은 창조론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자연은 스스로의 과정을 통해 생겨났고, 지적 개입(창조주)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창조한 분이 계심을 기록한다. 과학의 인과론을 적용해도 현재 만물의 결과가 있게 한 제일 원인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지적 설계 개념이 지지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다윈은 우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는 우주의 목적론을 반박했다. 즉, 우주는 우연한 사건에 의해 존재하며 목적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해나 별, 하늘, 꽃 한송이, 사람 등의 예를 들며 만물에는 각각의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기록한다. 세상의 어떤 책에도 해, 달, 별이 인류의 시간(24시간, 주 7일, 한 달)과 계절(4계절)과 사인(징조)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기록된 곳이 없다. 4. 다윈은 유물론적/자연주의적 철학의 근거를 제공해. 하나님의 존재는 불필요한 가설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편 14:1) 하는 말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로 신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이 나옴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유물론과 자연주의적 철학의 열매가 인류을 파괴시키는 근본임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인류를 병들게 하는 모든 해악의 근거에는 창조주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이 있다. 공산주의 이론의 근거도 유물론적인 진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5.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 (Aristotelian essentialism, 생물들은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메커니즘 때문 보다는 어떤 생명요소, 생명력, 또는 정신 때문에 살아있다는 믿음)을 종식시켰다. 즉 생명체들이 창조주 없이도 계속 영위될 수 있다는 논리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창조주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7).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7-27

[창조과학칼럼] 자동차 뒷 면은 전쟁 중

운전 도중에 자동차 뒷 면을 살펴 본 적이 있는가? 그 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기발한 방법들을 동원해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리는 곳이다. 국기로 알리는 애국심,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자랑하고픈 부모, 애관견 스티커로 나타내는 동물 사랑, 인생관, 취미, 유머……. 가히 살아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표현된 대부분이 약자, 글자, 그림이며, 가끔은 인형이나 실물 모형이 등장 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총과 칼, 대포 소리만 없을 뿐이지 종교적 전쟁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물고기 문양이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물고기 문양은 기독교인을 뜻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BC 64-250년간) 피해 비밀리에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그림이 사용되었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반을 그려 넣음으로서 서로가 기독교인임을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모형, 조각품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독자들께서는 이 물고기 문양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의 창조를 믿는 다는 뜻인 ‘헤엄치는 물고기’ 즉 ‘다리가 없는 물고기’ 문양이 있는가 하면, 진화론을 믿는다는 의미로 물고기에 다리를 붙인 ‘걷는 물고기’ 문양이 있다. 이것들은 같은 물고기 문양이지만 전하는 뜻은 180도 다르다. 진화론자들은 육상 생물은 해양 생물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믿는다.(이 부분, 진화론 또한 실험과학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다윈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걷기 시작한 물고기”의 흔적(화석)을 찿으려고 노력해 왔으나 발견된 적이 없다. 진화론에서는 약 3억 5천만 년 전에 해양과 육지 생물의 중간 단계로 살았다고 믿는 ‘실라컨스’(duddjfh wjrdjdi ehla)를 든다. 실라컨스는 앞 지느러미가 약간 휘어져 다리처럼 발달 되어 있고, 아가미 호흡과 허파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어, 물고기가 양서류로 진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1938년 전설로 알려졌던 이 물고기가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더우기 전혀 진화한 흔적이 없는 채로 발견되어 진화론 학계에 충격을 더해 주었다. 이 후, 200마리나 더 잡혔지만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아 중간 단계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창세기의 선언대로 현재 생물의 종은 불변이다. 이것은 실험 과학의 결과로서 창세기를 증거한다. 창조론, 진화론 모두의 물고기 몸통에 글씨가 적혀 있다. 창조론 물고기에는 ΙΧΘΥΣ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시다”)라는 헬라어 문장의 첫 머리 글자의 합성어가 적혀있고 ‘물고기’를 뜻한다. 다리가 달린 진화론 물고기의 몸통에 있는 글자는 “DARWIN”(다윈)이다. 우리 모두는 자동차로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다리가 달리 문양의 물고기로 진화론자 임을 나타내는 운전자를 위해, 성경은 미리 알려주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자료문의: 703-927-5116, Ark353.com

2010-07-20

[창조과학칼럼] 마지막 때의 바다

‘일생’이란 단어는 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살아있는 동안을 일컫는 말이다. 바다에 일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면 의아해할지 모르나 바다도 사람과 같이 탄생, 다사다난한 일생 그리고 죽음이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바다의 탄생은 지구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창조된 첫째날, 지구를 덮고 있는 물로 표현 되어 있다(창1:2.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바다’라는 이름은 창 1장10절에 아직 물로 덮혀있던 땅을, 물 위로 끌어올리신 후에 ‘뭍’(창 1:10. the dry ground ‘land’)이라 칭하시고 상대어로 ‘바다’(the gathered waters he called ‘seas’)라 칭하시며 생겨난 것이다. 처음 바다는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위해 적절한 환경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정기능의 역활을 부여 받았었다. 이러한 바다가 창세기 3장의 인류 타락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삶을 맞이하게 된다. 노아 홍수 때, 인류의 죄를 멸하기 위해 방주에 탄 생명체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지면에서 쓸어버리는 역활을 감당하며 (창 6:7 ‘move along the ground’), 창조되었을 때 지구를 덮었던 상황과 똑 같이, 다시 한 번 지구를 덮는 상황을 맞이한다(창 7:19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all the high mountains under the entire heavens were covered). 이 때 살아있던 수 많은 생명체를 진흙과 함께 땅 속에 묻는다. 즉 물(바다)은 창조되었을 때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였지만 창세기 6장에서는 ‘땅을 정죄’(창 6:7)하시겠다고 하신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살아있던 생명체들을 땅에 묻는 악역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화석이 생겨났다. 그 후에도 바다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사역을 감당하고 또 고통을 당한다. 애굽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도피 시키기 위해 물을 갈랐고, 요나의 이적을 증거하기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시켰으며, 바다에 빠지지 않고 걸으시는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이러했던 바다가 인류의 기술 발달로 예정된, 환경 오염을 맞이 한다. 사고의 숫자는 해마다 더해질 것이며, 범위는 날로 넓어질 것이며, 해악은 더욱 심각해 질것이다. 성경에는 탄생과 함께 오만한 인류 역사를 지켜 본 이 바다의 미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창조주의 재림이 있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게 된다. 이 때 “바다는 다시 있지 않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에서는 창조주에 대해 배신과 타락으로 얼룩진 이 땅과 하늘은 새롭게 변화하게 되나 현재의 바다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시편 95:5에서는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7-13

[창조과학칼럼] 성폭행도 진화의 결과라고?

한국 사회에서 초등생에 대한 성폭행(강간)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성폭행에 대해 진화론과 성경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폭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 생리학이 광대한 과학적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난치병까지 치료하고 있기에, 강간도 의학적 측면에서 연구된다면 사회적 범죄를 줄일 수 있기에 치료를 위한 과학화는 환영받을 일이다. 강간의 이유가 진화론측에 의해 ‘적응’이나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론적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자나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일반인에게 학문적 결과로 전달된다. 강간에 대한 대표적 진화 심리학적 책은 랜디 도힐(Randy Thornhill)과 크레이그 파머(Craig T. Palmer)가 쓴 ‘A Natural History of Rape: Biological Bases of Sexual Coercion(강간의 자연사: 성적 강제의 생물학적 기초, 2000)’가 있다. 여기에는 강간을 적응으로 보는 이론과 왕성한 성적 활동으로 생겨난 부산물로 보는 다른 시각이 기록되어 있다. 진화론 학자들은 인간의 강간을 설명하기 위해 동물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위에서 언급한 ‘강간의 자연사’ 저자인 랜디 도힐 교수가 선정한 연구대상인 모시밑들이(scorpion fly. 밑들이목 밑들이 과의 곤충)와 다른 과학자들이 언급하는 똥 파리(dung fly)다. 암컷 밑들이는 배의 끝부분이 전갈과 같이 위로 올라가 있어서 수컷한테 강간을 쉽게 당할 수 있는 점을 들어 강간을 오랜 세월 진화의 결과인 적응으로 결론짓는다. 똥 파리(dung fly)의 경우는 암컷이 ‘의도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강간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똥파리의 가설은 똥파리 암컷이 수컷과 성교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수컷은 강제로 성교(강간)를 하게 되는데 강한 수컷 만이 강간을 하게 되므로 수정된 것은 강한 놈(!)의 씨를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진화론은 “남자의 강간이 적응 및 자연선택된 행동의 진화적 결과”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인간을 동물로 보기에 동물 중에서 강간의 사례가 있다면 인류에게까지 적용시키는 것이다. 일부 곤충에서 강간할 때 쓰이는 신체 기관이 관찰된다고 해도 인간에게까지 적용시키는 것은 분명 무의미하다. 과거 역사에서 인간이 강간에 의해 번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화론적 연구대상으로 인간을 들기에는 인간이란 연구대상 자체가 너무나 크고, 넓고, 깊으며 다양하다. 간혹 진화론자들이 성경 신명기 20:13-14절을 들어 하나님도 강간을 허락하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 구절에서 여자를 취해도 좋다는 것은 전쟁에 진 노예로서의 의미다. 성경에는 창세기 34:2절에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한 것으로 처음 단어가 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행동의 결과인 강간보다도 마음에 음욕을 품고 있는 것 자체에 더한 질책을 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 5:28). 인류의 강간은 죄의 결과(창 3장)이며 정욕의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성경은 인간의 심리와 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책이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7-06

[창조과학칼럼]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 단 한번씩의 일생을 살아간다. 누구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을 꿈꾸며 산다.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시절에 유복한 부모에서 태어나 수준높은 교육을 받고 수월한 인생을 살아 간다. 또, 어떤 사람은 전쟁의 때를 만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한 평생 소용돌이 가운데 지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삶의 긴장에서 한발짝 물러나, 우리네 인생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지혜로운 자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많이 수고한 자가 더 많이 수확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즐거움과 기쁨을 추구하는 삶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과 지혜, 외모와 성품이 다 다르며, 죽으면 살아서 애쓰고 수고했던 것들도 결국 그 인생에겐 소용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 주신 지혜로 충만했던, 왕 솔로몬은 전도서에 이렇게 썼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지난 칼럼에 썼듯이, 우리의 양식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에 따라 저절로 생긴다. 물론, 사람은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수고를 자연법칙에 맞추어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지만, 적절한 비와 기온, 햇빛의 양에 좌우되는 기근과 풍년은 사람이 정하는 것도 아니며, 기계적인 법칙이 따르는것도 아니다. 사회와 문화가 발전해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람들은 열심히 자연의 법칙을 따라 기술과 지식, 문화의 발전을 이룬다. 그렇지만, 그러한 노력도 우리 삶에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경제위기와 공황을막을 수 없고, 역사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역사를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창조주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운’ 또는 ‘불확실성’이나 ‘확률’로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이 될 순 없다. 전도서 11장 4, 5절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환경과 불확실한 미래에 지배 받으며 전전긍긍 살 수 밖에 없지만, 창조주가 계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쓰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중간 중간에 그들의 인생을 대단한 역전 드라마로 장식한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초등학교를 9개월 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는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했는데, 그 빚을 갚는 데만 무려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는 주 의회 선거에서 낙선했고,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름을 항상 A. 링컨이라고 서명했다.”(1980년 2월 월스트리트 저널 광고 중에서).

2010-06-29

[창조과학칼럼] 바다의 일생

최근 워싱턴포스트 1면에 기름으로 덮혀 형체를 알 수 없는 페리칸의 사진이 실렸다. 멕시코만 원유유출 사태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극적인 장면이었다. 원래의 바다 모습과 역활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인류는 보고있다.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바다는 사람의 일생처럼 여러 경로를 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살펴본다.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바다의 기원도 진화론과 성경의 기록은 극히 대조적이다. 우선 바다에 대한 기록을 보자. 현재의 바다는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북극해, 남극해로 구분되며, 바다의 면적은 3억 6천 1백만㎢로 지구 표면의 약 71%를 차지하며, 평균 수심은 약 3,800m이다. 그 부피는 약 13억 7천만㎢이며, 지구의 물 중 98%가 바닷물이며 나머지 2%는 육지와 대기 중의 물이다. 이 바다는 인류가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생활을 위해 활용하며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그 역할 또한 다양하다. 적도지방의 열을 극지방으로 이동시켜 지구의 온도를 일정하게 해주며, 수산물의 어업활동을 할 수 있게해 식생활을 해결해 준다. 환경 측면에서는 온난화 기체인 이산화탄소도 대기보다 60배가 많아 지구의 기후를 결정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이렇게 귀한 물의 진화론적 기원은 어떤가?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어떻게?) 나올 때는 높은 온도의 가스 덩어리였으나 점차 식어가면서 액체 상태로 뭉쳐지게 되었고 그 후, 차차 굳어져 표면이 바위로 변하였다고 본다. 점점 식어가는 동안에 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두터운 구름을 형성하게 되었고(대기권의 진화?), 많은 빗물이 모여 바다가 생겨나게 되었으며(소금의 출처는?) 높은 곳은 산이 되었다고 본다. 비가 오늘날과 같이(동일과정설에 의해)내린다고 가정하면(실험과학의 결과가 아니다.) 약 10억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창세기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물은 지구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지구와 함께 하였다고 알려주며, 완성된 물질(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공유결합)로 나타난다. “땅(지구)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지구와 함께 창조된 바다의 일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2010-06-22

[창조과학칼럼] 시간, 창조주의 흔적

진화론적 특성상 과거의 인류에게 오늘날과 같은 지식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없다. 진화론적 맥락에서 지식이란 진화되어 오는 긴 과정에서 축적되거나(?) 얻어진(?) 산물이다. 진화론의 허구는 시간에 관한 인류의 지식을 보더라도 밝혀진다. 성경 다니엘 3장1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60)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6) 규빗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로 옛 사람들의 지식에 관해 알아보자. 참고로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 혹은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시간에 대해 언급하려면 우선 이 질문에 먼저 답해 봐야 한다. 어째서 60초가 1분인가? 왜 한 시간이 60분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자연적 원인을 찾을 수 없다. 1년이라는 시간 단위는 하늘에서의 태양의 위치에 근거한 자연적인 시간 측정이다. 그런데 한 시간의 길이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숭배하기를 거절했던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의 크기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은 60규빗의 높이와 6규빗의 넓이를 가졌다. 이것은 아마도 그 당시의 바벨로니아가 60진법의 계산법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많은 구조물들이 60단위나 60진법의 하위단위로 측정되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1,300년쯤에 이집트인들은 하루를 낮 12시간과 밤 12시간으로 나누었다. 이 계산법 하에서 여름의 낮 12시간은 겨울의 낮 12시간보다 더 길었다. 그렇지만 이 계산법은 꽤 잘 맞아떨어졌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이 해시계로 시간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계산법은 60진법의 계산법과 함께 바빌로니아로부터 차용되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12시간의 지정은 바빌로니아로부터 왔다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60이 12로 나누어지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산법은 헬라인에게로 전해졌고 다시 로마인들에게 전해졌다. 주후 13세기에 와서 정확한 기계적 시계가 발명되었고 시간은 마침내 60분으로 나누어졌다. 현재의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이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고대의 인류가 결코 현대인보다 뒤떨어진 인간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000년 전에 이미 인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시간 계산법을 발명할 정도로 충분히 똑똑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질문, 왜 60초가 1분이며, 왜 1시간이 60분인가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 첫 째날 창조된 지구는 창조의 순간, 시간과 함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지구란 60초가 1분이며, 1시간이 60분을 담고 있는 시공간 속에서 존재하도록 창조되어진 것이다. 설계되고 계획된 창조주의 흔적이다.

2010-06-15

[창조과학칼럼] 사람과 상어가 친척?

허구의 진화를 가정하다보면 웃지 못할 연구가 많이 나온다. 진화론에서는 생명체가 해양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다 보니 해양 생물과 인류를 비교하게 되는 논문도 나오게 되고 이를 근거로 인류의 해양 기원을 단정 짓는다. 진화론적 자연주의(evolutionary naturalism)는 각 생물체가 수십억 년 전에 살았던, 알려지지 않고, 관측되지 않으며, 그 어떤 화석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공동조상(common ancestor)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진화론 과학자들은 이를 증명할 수 없는데도, 그 가정을 사실(fact)로 선포하며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고 있다. 진화론에 기초해 연구된 사람과 상어의 공동조상 유래도 같은 맥락의 결과이다. 이 연구는 현대 사람은 상어(sharks)와 같은 일부 유전자(genes) 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 유전자들은 같은 구조로 암호화되어 있지 않다) 바다 무척추동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상어에게 여섯 번째 감각을 주며, 전기적 신호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같은 유전자들이 또한 사람에 있어서 머리와 얼굴 특징의 발달에 관여한다는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발견은 결국 사람으로 진화되어진 초기 바다 생물체들은 또한 그들이 육지 위로 올라오기 전에 전기(electricity)를 감지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많은 관련 유전자(DNA)들이 복잡하고,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다른 유전자들을 활성화하거나 불활성화가는 것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창조론 과학자들도 상어에서 여섯 번째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유전적 스위치가 사람의 머리와 안면의 발달에 똑같이 관여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람, 상어, 생쥐의 유전자에 이것이 있다는 것도 사실로 인정한다. 머리와 얼굴 특징과 같은 직접적인 발달에 상호 작용하는 마스터 조절 유전자(master regulatory genes)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전자 스위치가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과 이들 생물체들과 진화론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과학적인 믿음의 도약인데도 세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지고 일반인들은 과학자의 발표라는 이유만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사한 스위치가 공통적인 선조를 의미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기 위해서는 화석 기록이 바다생물에서 인간으로의 전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는 지금껏 없다. 만물을 창조할 때의 창조 시기를 기록한 성경에는 물 속 생물의 창조(창1:20. 5일째)와 인류의 창조 시기(창1:26. 6일째)를 분명히 달리 기록하고 있다. ▷자료제공: 한국창조과학회 워싱턴지부(703-927-5116, www.Ark353.com)

201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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